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포에니 전쟁 (문단 편집) == 그 후 == 포에니 전쟁은 고대 지중해 세계가 그때까지 경험해 본 적이 없는 엄청난 대전쟁이었다. 장장 100년 동안 도합 100만명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해 지중해 세계 전역을 무대로 벌인 가히 고대판 세계대전이었다. [[갈리아족]], 이베리아족, [[누미디아]] 왕국, [[시칠리아]]의 도시국가들과 지중해의 [[해적]]들, 그리고 [[마케도니아]] 왕국 같은 기존의 강대국들도 참전하면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질서를 아예 새로 쓴 전쟁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이나 [[키루스 대제]]의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제국]] 건설도 큰 전쟁이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대에 포에니 전쟁보다 더 큰 전장은 중국 대륙에서 [[전국칠웅]]이 벌이고 있었던 [[전국시대]]가 유일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는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다. 주요 섬들이 모두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고 전쟁을 거치면서 건설된 거대한 해군력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했다. 육군력 역시 희대의 명장 한니발을 상대하면서 그의 전략 및 전술을 벤치마킹한 결과, 전쟁 이전에도 이미 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하고 잘 조직된 군대로 평가되었던 로마의 육군은 경쟁국가들의 군대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들과 벌이는 전쟁을 보면 2~3배[* 비록 기록의 신빙성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때로는 10배.]의 적을 너무나도 쉽게 압살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작용도 없지 않았는데 때를 같이하여 여러 정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수십 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자기 농장을 경영하던 시민권자들(자영농 중산층)이 대부분 몰락하면서[* 후반에는 무너지지만 로마 제국의 경우, 시민권자만 군인이 될 수 있었다.] 경영불량 상태가 된 평민들의 농지는 대지주들에게 넘어갔고, [[라티푼디움|새로 얻은 비옥한 해외 식민지]]에서 싼값의 농산물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들어오면서 로마의 자영농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들은 로마 내전기 동안 유력 정치가의 사병이 되어 그들의 주인을 위해 싸웠다.] 반면 로마 귀족들은 이렇게 몰락한 자영농들의 농장을 헐값에 긁어모았을 뿐만 아니라, 포에니 전쟁 당시에 매입한 전쟁공채 비용 중 1/3에 해당하는 금액은 공유지를 불하받는 방법으로 돌려받으면서 어마어마한 토지와 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이후 로마는 이러한 빈부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를 놓고 엄청난 부를 획득하며 부상한 대지주 귀족계급과 몰락한 빈농들을 대변하는 민중파 세력들 간의 숙청과 정쟁으로 얼룩지게 되었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인들이 선택한 것이 공화정의 해체와 제정의 성립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포에니 전쟁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대귀족들은 공화정을 지키려 했고, 반대로 몰락한 빈농들은 그들의 편이 되어준 그라쿠스 형제나 마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응원하여 결국은 제정이 세워지게 되었다.][* 애초에 민중들 입장에서는 공화정을 지지할 이유가 없었는데, 공화정을 경영하는 원로원이 로마의 최상류 기득권층이 되어 민중을 위한 모든 변화와 개혁을 거부한 채 그런 주장을 하는 정치인들을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하며 불법적으로 죽여버렸다. 즉 민중들은 도저히 기존 체제로는 자신들의 삶에 변화가 오지 않으니 기존 체제에 대한 지지가 떨어질 수 밖에 없었다.] 반면 카르타고는 아예 멸망당했다. 로마는 최소한 제정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패배한 상대국을 정복하기보다는 동맹이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것을 선호했다. 이것이 피지배층의 반감을 덜 사는 훨씬 효율적인 통치 방식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그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안겨준 엄청난 충격과 고통 때문에 로마는 카르타고에겐 이전에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종료 후에도 그야말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명분만 노리다가 끝내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도시도 폐허가 되었다. 로마가 패전국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한 경우는 카르타고를 제외하면 수차례에 걸쳐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킨 [[유대 왕국]], 계속해서 로마에 반기를 들은 [[코린토스]] 정도 뿐이었다. 결국 한니발 자신은 그 엄청난 능력으로 로마의 최대 적수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나 역으로 자신이 로마에 남긴 충격 때문에 자국의 멸망에 일조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118년에 걸쳐 3번의 전쟁을 겪었고, 마지막 제3차 전쟁도 차포 다 뗀 상황에서 3년이나 로마 정예군의 맹공을 버텨냈던지라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증오는 대단했다. 3년간의 공성전으로 폐허가 다 된 카르타고[* 카르타고에 소금을 뿌려 식물을 못 자라게 했다는 말도 있다. 《성경》에도 [[https://www.bible.com/ko/bible/86/JDG.9.45.KLB|사사기 9:45]]에도 있을 만큼 과거부터 이용된 방법인데 실제로 이를 행했는지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https://en.wikipedia.org/wiki/Salting_the_earth|위키백과]]에 따르면 이 소금에 절인 이야기는 《캠브리지 고대사》(1930)의 첫 번째 판, Bertrand Hallward의 기사에서 학술 문헌에 처음 들어갔다고 보고 있다.]를 다시 한번 건물 한 칸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부숴버렸고, 남아있는 카르타고 시민들에 대해선 학살과 약탈을 자행한 다음 생존자들까지 노예로 팔아버렸다. 수백 년간 강대국으로 번영한 도시인 만큼 카르타고는 지리적인 이점이 많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가 복구되기까지는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복구 계획이 세워졌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미뤄졌다.] 그만한 요충지를 100년간 황무지로 내버려둘 만큼 로마인들의 카르타고에 대한 공포와 증오는 대단했다. 7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번영을 누렸고, 로마와 100년에 걸친 대전쟁을 벌인 강대국이었던 만큼 로마인들도 카르타고의 멸망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던 듯하다. 특히 직접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남긴 술회가 유명하다. 스키피오와 함께 제3차 포에니 전쟁에 참가했으며 훗날 《포에니 전쟁사》를 저술한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불타는 카르타고 시를 바라보며 비애감에 젖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읊으며 >'''"훗날 언젠가 로마도 이처럼 멸망할 것이다."''' 라고 말하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로마 전쟁영웅사》(아드리안 골드워디 저, 강유리 옮김, 말글빛냄) p.153.] 스키피오는 전쟁 이후 맞닥뜨릴 로마 공화국의 변화를 진지하게 걱정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그 강대한 카르타고도 이렇게 되었으니 로마 역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란 단순한 감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이 발언은 결과적으로는 약간 사실이 되었다. 물론 로마 자체는 공화정이 무너진 뒤에도 400여 년[* 동로마를 포함할 경우 1,400년] 존속했지만 위에서 나왔듯이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로마 공화국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로마 공화국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사 [[동로마]]가 [[콘스탄티노플 함락|똑같은 방식으로 멸망]]했다.[* 다만 [[서로마]]는 카르타고와 전혀 다른 멸망 과정을 거쳤다. 장엄하고 처절한 대전투, 처참한 학살 및 약탈 따위는 없이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의 폐위로 멸망했고, [[신성로마제국]]도 마찬가지 방식으로 멸망했다.] 즉 의도치 않게도 스키피오는 당시 로마의 국체인 공화정 로마의 멸망과 동로마제국의 최후를 경고한 셈이 되었다. 곁들여서 당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군영에는 훗날 로마 역사에서 유명해지는 [[그라쿠스 형제]]의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참전하고 있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